1957년 2월 12일 제주도 북제주군 구좌면 행원리(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신천 강씨이고 호는 향덕(香德)이다. 숙명여자중학교, 경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에서 생명문화학 석사를 취득했다. 종교는 불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으며, 세례명은 에스테르이다. 현재는 법무법인 원의 구성원 변호사이자 '진짜 대한민국 선거대책위원회'의 총괄선대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법조계에서 강금실은 진보적인 판사이자 인권 변호사로 널리 알려졌다.
제23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제13기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서울민사지방법원 및 서울고등법원 판사를 거쳤다. 이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부회장, 국무총리실 행정심판위원, 법무법인 지평 대표변호사 등을 지냈으며, 참여정부 시절인 2003년 2월부터 2004년 7월까지 법무부 장관으로 재직했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최초의 법무부 장관이었으며, 외교통상부 여성인권대사로도 활동했다.
정계에서는 진보진영의 상징적 인물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대통합민주신당 및 통합민주당 최고위원을 지냈고, 더불어민주당 소속으로 경기도 기후대사, 제4대 강원문화재단 이사장, 이재명 대통령 경선 후보 후원회장 등을 맡았다. 최근에는 위성락·서왕진 국회의원의 후원회장을 맡으며 여전히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미세먼지 문제 해결을 위한 국가기후환경회의 자문위원 등 환경 분야에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강금실은 대한민국의 법조인, 전 정무직 공무원, 전 정당인으로,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의 여성 법무부장관이자 최연소 장관이라는 타이틀을 동시에 지닌 인물이다. 정치권과 법조계를 넘나들며 개혁적 인물로 주목받았고, 이후에도 다양한 사회참여 활동과 정치적 행보로 꾸준히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1. 강금실 - 생애와 초기 경력
강금실은 1957년 2월 12일, 제주도 북제주군 구좌면 행원리(현재의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에서 교육자인 아버지 강계돈과 어머니 김계옥 사이에서 태어났다. 2남 4녀 중 넷째 딸로 성장했다.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1981년 제23회 사법시험에 합격하며 법조계에 입문했다.
1983년부터 1995년까지 판사로 재직하였으며, 특히 1990년에는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형사단독판사직에 올랐다. 1988년 제2차 사법파동과 관련해 개혁 성향의 법조인 모임 ‘우리법연구회’ 창립에 참여했고, 이후 1993년 제3차 사법파동에서 김덕주 당시 대법원장의 퇴진을 이끌며 개혁적 성향을 뚜렷이 드러냈다. 1995년 판사직을 내려놓고 1996년부터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다.
변호사로서도 강금실은 사회적 소수자와 인권 보호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대표적으로 2000년에는 이석태 변호사와 공동으로 《호주제 폐지를 위한 법적 접근》을 집필하며 민법상의 호주제 폐지를 강력히 주장했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의 부회장으로 재직하면서 시민 인권 변호사로 활동했다.
2. 법무부장관 시절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강금실을 초대 법무부장관으로 임명하였다. 이로써 강금실은 역대 최연소(만 46세), 최초의 여성 법무부장관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강금실의 임명은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던 문재인이 노 대통령에게 강금실을 천거하면서 성사되었다. 문재인은 환경부나 복지부 장관직을 제안했으나, 노무현은 “여성 장관은 특정 부처에만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야 한다”며 법무부장관으로의 임명을 추진했다.
장관 재직 시절, 강금실은 검찰 조직 개혁의 상징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으나, 실질적인 조직 개혁에는 한계를 드러냈다. 법무부 주요 직위에 검찰 출신이 대거 포진해 있어 개혁 추진력이 미흡했으며, 검찰과의 소통 부재 속에 법무부+청와대가 검찰총장의 의견을 거치지 않고 인사를 단행하는 등 파열음을 낳았다. 이로 인해 검찰청법이 개정되기까지 했다. 노무현 정부는 ‘검찰개혁’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으나, 실제로는 검찰의 집단 반발과 대선자금 수사 등으로 인해 개혁 동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금실의 가장 큰 공적 중 하나로는 호주제 폐지가 꼽힌다. 2003년 초 장관 재임 시절, 호주제 폐지를 명시적으로 언급하며 법무부의 입장을 선도적으로 표명했고, 이는 2005년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과 민법 개정, 2008년 가족관계등록법 시행으로 이어졌다.
다른 한편으로, 2003년 외국인 지문날인 제도 폐지를 추진하며 비판을 받기도 했다. 9.11 테러 이후 생체정보 수집이 국제적 흐름이었던 상황에서, 외국인에 한해 지문날인을 폐지한 것은 국내외에서 역차별 및 안보적 문제로 지적되었다. 결국 후임 이명박 정부에서 이 정책은 폐지되고 외국인 생체정보 수집이 재도입되었다.
3. 정치 활동
2006년, 강금실은 열린우리당에 입당해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하며 정치에 입문했다. 당시 열린우리당은 극심한 지지율 하락 속에서 선거를 치렀으나, 강금실은 초기 여론조사에서 홍준표, 맹형규 등의 한나라당 후보군을 앞지르며 여당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이에 한나라당은 정계 은퇴 상태였던 오세훈을 긴급 영입해 대항마로 내세웠고, 결과적으로 강금실은 선거에서 27.31%를 얻고 낙선하였다.
2007년에는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대선후보의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고, 2008년에는 통합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었으나 18대 총선에는 출마하지 않고 사실상 정치에서 한발 물러섰다. 이후 2016년에는 녹색당을 공개 지지하며 정치적 색깔을 확장하였고, 2017년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에서는 안희정 후보를, 2021년에는 이재명 후보를 지지하며 후원회장을 맡는 등 점진적으로 민주당 중심 정치로 복귀했다.
2025년 4월에는 이재명 대선후보의 공식 선대위인 '진짜 대한민국 선거대책위원회'에 합류하며 정치 전면에 복귀했다.
4. 정당 활동 이력
강금실의 정당 활동 이력은 다음과 같다.
• 열린우리당(2006~2007): 서울시장 선거 출마 및 정계 입문
• 대통합민주신당(2007~2008): 대선 공동선대위원장
• 통합민주당(2008): 최고위원
• 민주당/민주통합당(2008~2012): 활동 후 탈당
• 무소속(2012~2025): 정치 활동 자제
• 더불어민주당(2025~): 복당 및 정계 복귀
5. 주요 선거 이력
•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후보 (열린우리당)
득표율: 27.31% (1,077,890표)
결과: 낙선 (2위)
6. 사적 이야기 및 여담
강금실은 1984년 출판인 김태경과 결혼하였으나 2000년 이혼했다. 김태경은 과거 '자본론' 출판으로 인해 구속되었고, 당시 현직 판사였던 강금실은 검찰에 의견서를 제출하며 남편을 변호한 일화가 있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친구 같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김태경은 2014년 간암으로 별세하였다.
원래 불교 신자였던 강금실은 2004년 가톨릭으로 개종하였고, 세례명은 '에스더'이다. 고등학교·대학교 선배였던 이영애 전 대법관이 대모를 맡았다.
법조계 인물들과의 인연도 두텁다. 김영란 전 대법관, 조배숙 전 의원과는 숙명여고 및 서울대 법대 동기이며, 현 대법원장 조희대와는 사법연수원 동기이다.
또한 법무법인 지평 재직 시절, ABL생명(당시 제일생명)의 여직원 우선 해고 사건에서 원고 측을 대리해 승소하기도 했다. 가수 전인권이 마약 투약 혐의로 구속되었을 때 변호를 맡아 선처를 이끌어낸 일도 있다. 이 인연은 이후까지 지속되어 전인권이 강금실의 토크콘서트에 게스트로 출연한 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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